
중국·러시아의 저가 원전 공세 막아야…한미일 SMR 협력, 한국 에너지 안보와 원전 주도권 지킬 전략적 방어선
한국과 미국, 일본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소형모듈원자로, 즉 SMR 도입을 공동으로 지원하기 위한 협력각서를 체결했다. 이번 협력은 단순히 세 나라의 원전 기업이 해외 사업을 함께 추진한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국과 러시아가 저렴한 가격과 국가 차원의 금융 지원을 앞세워 세계 원전 시장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장기간 특정 국가의 원전 생태계에 종속될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고 국제 원전 공급망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라는 의미가 크다.
한미일 외교장관은 지난 7일 인도·태평양 국가들의 SMR 도입을 지원하기 위한 협력각서에 서명했다. 세 나라는 미국의 첨단 원자로 기술, 한국의 원전 시공·제조 역량, 일본의 소재·부품과 산업 기반을 결합해 인도·태평양 지역을 시작으로 세계 SMR 시장에 공동 진출할 계획이다. 각국이 가진 약점을 보완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하지 않는 원전 선택지를 제시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협력에서 한국의 역할은 결코 부수적이지 않다. 미국은 SMR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원전 시공 경험이 크게 줄었다. 일본 역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관련 공급망이 축소됐다. 반면 한국은 고리 1호기 건설 이후 수십 년 동안 원전 설계와 기자재 제조, 건설, 운영 역량을 축적해 왔다. 정해진 예산과 공사 기간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키는 능력도 한국 원전 산업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세계 원전 시장이 순수한 가격 경쟁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전은 한 번 건설하면 설계와 연료 공급, 정비, 핵폐기물 관리, 인력 교육과 규제 체계까지 수십 년에서 100년 이상 이어질 수 있는 국가 기반시설이다. 초기 건설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의 원전을 선택하면 해당 국가는 장기간 그 나라의 기술, 부품, 연료와 운영 체계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원전 수출은 단순한 발전소 판매가 아니라 상대국의 에너지 정책과 산업 구조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특히 중국은 원전 공급망의 90% 이상을 자국 안에서 조달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자체 공급망과 국가 금융을 결합하면 단기간에 낮은 가격을 제시하고 해외 시장을 빠르게 확대할 수 있다. 중국은 상업용 규모의 SMR 설치도 추진하고 있어 향후 인도·태평양 신흥국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수출 경쟁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원전 건설과 금융, 장비, 운영 기술을 하나의 패키지로 제공한다면 초기 자금이 부족한 국가들은 쉽게 그 구조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중심의 원전 생태계가 확대되는 것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부담이 된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식 원자로와 안전기준, 부품 규격이 널리 채택될수록 한국 기업이 진입할 수 있는 시장은 줄어들 수 있다. 중국이 자국 기술을 기반으로 사실상의 국제표준을 먼저 형성할 경우 한국 기업은 가격뿐 아니라 규격과 인증, 금융 조건까지 불리한 환경에서 경쟁해야 한다. 이는 원전 수출 감소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설계·건설 인력, 기자재 기업과 연구개발 생태계 전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산업 안보 문제다.
원전 공급망의 중국 의존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원전은 일반 소비재와 달리 부품 하나를 다른 제품으로 즉시 교체하기 어렵다. 안전성과 규제 승인을 충족해야 하므로 특정 국가의 핵심 기자재나 연료 체계에 의존하게 되면 공급이 중단됐을 때 대체 공급자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외교적 갈등이나 수출통제가 발생하면 에너지 기반시설이 직접적인 압박 수단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이 반도체와 배터리, 희토류 분야에서 경험한 공급망 위험을 원전 산업에서 반복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원전 수출 방식도 같은 경고를 준다.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은 원자로 건설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지원, 핵연료 공급, 유지보수와 사용후핵연료 처리까지 원전의 전 생애주기에 관여한다. 이런 방식은 개발도상국에 매력적인 조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해당 국가를 러시아의 기술과 정책에 장기간 결박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중국 역시 충분한 산업 기반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비슷한 영향력 모델을 구축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미일 SMR 협력은 단순히 중국과 러시아보다 원전을 더 많이 수출하기 위한 경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세 나라가 함께 안전기준과 규제 원칙, 금융 구조와 공급망 투명성에 관한 국제표준을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 아직 SMR 분야는 기존 대형 원전과 비교해 국제적으로 통일된 규정과 인허가 체계가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지금 어떤 국가의 기술과 규범이 먼저 시장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향후 수십 년간 세계 SMR 산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단순한 시공 하청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미국의 원천기술을 받아 건설만 담당하는 구조가 아니라 한국형 혁신 SMR 기술, 핵심 기자재, 운영 시스템과 안전기준을 공동사업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공동 진출 과정에서 지식재산권과 수익 배분, 현지 사업 주도권을 명확히 확보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뛰어난 시공 능력이 다른 국가의 기술을 실현하는 도구로만 이용될 위험도 있다.
정부와 원전 업계는 한미일 협력을 활용해 국내 원전 산업의 연구개발과 인력 양성, 기자재 공급망을 동시에 강화해야 한다. 해외 수주 한두 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부터 건설, 연료, 유지보수, 해체까지 전 주기를 담당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해야 한다. 중소 기자재 기업에 대한 투자와 장기적인 전문인력 확보도 필수적이다. 원전 산업은 한 번 기반이 무너지면 짧은 기간 안에 복구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인도·태평양 국가들에도 분명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보다 가격이 다소 높더라도 안정적인 공급, 투명한 계약, 예측 가능한 유지보수, 국제 안전기준과 정치적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협력 모델을 제공해야 한다. 단순히 중국산 원전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시장을 지킬 수 없다. 한국의 건설 능력과 미국의 기술, 일본의 제조 기반이 실제 사업에서 더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한미일 SMR 협력은 한국에 새로운 수출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가 장악하려는 원전 공급망에서 전략적 거리를 확보하는 방어선이 될 수 있다. 중국의 낮은 가격 뒤에는 장기간의 기술 의존과 표준 종속, 공급망 통제라는 비용이 숨어 있을 수 있다. 한국은 원전을 단순한 수출 상품이 아니라 국가의 에너지 안보와 산업 생존을 결정하는 핵심 전략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
앞으로 세계 원전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SMR 시장에서 지금의 선택은 수십 년 뒤 한국의 위치를 결정한다. 한미일 협력이 선언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 기술개발과 수주, 국제표준 제정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중국과 러시아가 가격과 국가 자본을 앞세워 시장을 선점하기 전에 한국은 기술력과 신뢰성, 안전한 공급망을 기반으로 원전 주도권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기업 몇 곳의 수출 실적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에너지 안보와 산업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장기 전략이다.